본문 바로가기
일상/문화 컨텐츠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by 닮은샬걀 2021. 3. 20.
반응형

내 주위의 여성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교보문고

More Pie Less Bullshit 여성에게 더 많은 파이를! “여자라고 더 착하거나 도덕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건 여성이 사회적, 육체적 약자로서 권력에 더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www.kyobobook.co.kr

  • (p.6) 가슴속에 끓어오르던 의문의 퍼즐 조각이 맞춰질수록,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문제들이 한 지점을 가리킬수록 동시에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태어난 이후부터 쭉 내가 가부장제 중독자로 살아왔으며 여전히 중독 상태라는 것.
  • (p.8)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듯 큰 야망엔 큰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야망은 오히려 독이다.
  • (p.14) 임신과 출산이 그렇듯 정말 여자에게 필요한 정보들은 걸러지고 차단되고 미화된다.
  • (p.18) 성적 대상화와 후려치기를 번갈아 당하며 맘껏 소비되던 2, 30대 여자가 40대가 되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다. 직장은 물론 광고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내나 엄마 같은 가부장제 입맛에 맞는 역할을 제외하고는 다뤄지지 않는다. 특히 가부장제에서 이탈한 여성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책 읽는 여자 아이돌만큼이나 체제 위협적이므로 검열의 대상이 된다.
  • (p.27) 야망은 소년들의 몫. 소녀들은 야망을 키우고 드러내게끔 키워지지 않는다. 착하고 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하지만 그건 가부장제가 잘 굴러가는데 필요한 여성성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여성성'은 대개 그럴 확률이 높다.
  • (p.32) 남성에게 드러낼 수 없는 공격성이 여성에겐 쉽게 표출된다. 내 손에 권력이 쥐어졌을 땐 더욱 그렇다. 그것이 일시적인 소비자 권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p.33) 여자라고 더 착하거나 도덕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건 여성이 사회적, 육체적 약자로서 권력에 더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부도덕해질 수 있다. 남자만큼 혹은 남자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평화주의가 아니며 도덕성 투쟁이 아니다. 남자들에게 빼앗긴 여자 몫의 파이를 되찾는 투쟁이다.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다. 먼저 이것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내 기분 좋자고, 힐링하려고, 더 멋진 나로 꾸미려고, 더 나은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 게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실. 자기계발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라는 사실. 페미니즘이 남성 중심 사회와 가부장제를 향한 생존 투쟁이자 해방운동이라는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여자들은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답답한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듯 과도한 도덕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p.42) 일단은 이 지옥에서 벗어나자.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외롭게 사표를 낼 것이다. 사표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 (p.44) 가부장제의 실체에 눈뜨기 전이라면 서른이든 마흔이든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다. 직업적 지식과 경험은 쌓았을지언정 막상 여자에게 결혼이 어떤 제도인지는 모르는 헛똑똑이. 그게 나였다. 스니커즈 하나를 사도 눈이 빠지도록 검색하고 공부하면서 왜 결혼에 대해서는 그럴 생각을 못했는지. 아마 결혼 제도보다 결혼 상대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숲을 보지 못하도록 나무에만, 사랑에만 집중하도록 평생 미디어의 조련을 받은 탓도 있다.
  • (p.45) 결혼을 통해 사회생활의 조력자를 얻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결혼과 함께 조력 노동까지 추가될 뿐이다.
  • (p.47) 지극히 평범한 한국적 결혼 속에서 나를 뺀 모든 이들은 순식간에 적응해갔다. 몇 번의 명절과 각종 집안 행사를 거치는 동안 며느리라는 위치에 불응하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굴욕감을 카펫처럼 바닥에 깔고 간다. 부부 관계가 아무리 평등하다 해도 사회적 가장의 자리를 남자에게 넘겨주는 가부장에 자체가 이미 여성이 이등 시민임을 전제하는 제도다. 똑같이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데도 고스란히 여자에게 쏠리는 가사 노동만큼이나 이 굴욕감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 (p.48)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관계를 포기한 여자와 관계에 둔감한 남자의 조합"이 일본의 부부 생활을 유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엄마와 언니를 포함, 내 주변의 거의 모든 기혼 여성들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 농담 아닌 농담으로. "포기하는 게 속 편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한단 거지? 아파트, 자식, 노후, 제도적 보호, 정상성...... 결혼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포기하기 싫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며느라기'처럼 관계를, 존엄을, 나를 조금씩 포기해야만 유지되는 게 한국의 결혼이라면 굳이 이 제도가 존속할 필요가 있을까? 누구의 이득을 위해서? 결혼의 수혜자가 여성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이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탈혼을 선택했다. 포기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 (p.52) 그 많은 식당, 병원, 도시락업체, 급식업체 주방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들은 상황이 다르다. 우리 집에 오시는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처럼 그들은 집에서도 쉴 수 없다. 남편과 자식들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퇴근하면 또 다른 노동들이 시작될 뿐이다. 집 밖에서 하면 최저시급이라도 받지 집 안에서는 같은 일도 철저하게 무급이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의 뒤축은 한국 여성의 무급 노동이 떠받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남자의 얼굴을 한 국가는 여자들이 닥치고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그림자 노동을 제공하길 바란다. 결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쉽고 편한 방편이다. 이성애, 모성애, 가족애 등 각종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 (p.53) 며칠 전 시골로 내려가 은둔하는 어느 명예교수의 '외톨이 생활 두렵지 않다!'는 인터뷰를 봤다. 방문한 기자에게 "부인이 직접 만든 음료를 내왔다"는 대목에서 실소가 터졌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소로의 밥과 빨래를 엄마가 해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허탈함이었다. 최근엔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누가 박사학위를 받았다거나 작품을 완성했다거나 수상을 했다거나 하면 그 남자가 대단해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주변의 여자들이 보인다.
  • (p.54) 일터에서 나와 경쟁하는 평범한 기혼남들, 결혼 후 멀끔해진 그들에게 하나씩 배당된 마법의 손. 솔직히 나도 그 '보이지 않는 손'을 갖고 싶다. 이런 마음을 도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줄래?"라고 표현한다. 국내 수급이 어려운 농촌 남자들은 동남아에서 수입해온 지 오래다. 국가는 거기에 돈을 지원한다. 예전 같으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겠지만 아내라는 이름으로 다른 여성을 착취하는 일임을 이제는 안다. 한 여성-엄마의 노동을 이만큼 무급 착취했으면 충분하다.
  • (p.59) 어떤 업종이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수의 여자가 그 일에 종사할 땐 임금도, 전문성도 얻지 못하다 남자들이 진입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다. 셰프가 대표적이고 최근엔 보험 설계사가 그렇다. 취업난으로 수가 늘어난 젊은 남자 보험설계사들은 전문성을 강조하며 기존의 중년 여성 설계사들을 빠르게 몰아내고 있다.
  • (p.60) 반면 소비는 어떤가? 책, 뮤지컬, 연극, 전시 등 다른 모든 문화 상품들처럼 카페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건 여자들이다. 밥보다 비싼 스타벅스를 애용한다는 이유로 '된장녀'란 멸칭을 얻고, 하루 커피 한잔 사먹는 대신 불우한 아동을 도우라는 압박 속에서도 여자들은 아낌없이 커피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그것도 남자들 임금의 63%를 받으면서.
  • (p.61) 캐나다인 남자 CEO는 한국 여자들에게 특별히 고맙다고 말한다. 결국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 적게 벌면서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는 셈이다. 주로 남자들에게.
  • (p.62) 요즘 나와 내 주변 여자들은 여자에게 일 몰아주기를 실천하고 있다. 은밀하고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행사에 여자 강사를 초빙하고, 여자 필자를 섭외하고, 여자 사진가를 부르고, 여자 보험설계사를 쓰고, 누가 소개해달라고 하면 "일을 잘해서요"라면서 여자를 추천하고, 어떻게 해서든 여자가 돈을 더 벌고, 일과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의 사다리가 되어 주는 것. 영화 <히든 피겨스> 속 대사처럼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 될 테니까. 다행히 나와 당신에겐 선택의 기회가 있고, 소비자로서 그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모이기만 하면 된다. 기왕 쓰는 돈, 여자에게 쓰자.
  • (p.89) '남자에게 욕망당하기'는 권력이 아니다. 여자들에게 주어진 미션, 여자들끼리의 외모 경쟁이자 남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위다. 왜 돈은 돈대로 들고 유통기한도 짧은 레이스에 뛰어들어야 하나? 남자에게 욕망당해야 여자로서 존재 가치가 높아진다는 건 거대한 사기다. 예쁘다고 월급을 더 받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할리우드 여자 배우들조차 남자 배우들에게 훨씬 못 미치는 출연료를 받는다.
  • (p.103) '여자는 얼굴, 남자는 능력', 여자들은 수학 공식처럼 주입받는다. "잘생기면 얼굴값 한다"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사냐" 같은 말로 여성의 남성 성적 대상화는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그러다 보면 얻게 되는 건 뚱뚱한 남자도 듬직하다며 치켜세우는 스킬뿐이다. 반대로 대상화에서 벗어난 남성은 자유롭게 여성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고 부위별로 재단하며 판관 권력을 갖는다.
  • (p.108) 뼈에 새겨지다시피 한 성적 대상화, 남성 숭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성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좋아서 하는 다이어트? 좋아서 하는 덕질? 나의 선택,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첫 단계다. 이 과정 없이 가부장제에서의 독립은 성공할 수 없다. 설사 경제력이 있다 해도 말이다.
  • (p.112) 세계가 놀라는 '뷰티 산업 강국'의 실체는 바로 '꾸밈 억압 강국'이었다.
  • (p.112) 그렇게 주체적 꾸밈에 한껏 취해 졸라맨 건 나만의 코르셋이 아니었다. 나의 그것을 전시함으로써 주위 동료와 후배들, 거리며 지하철에서 마주친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 온라인 친구들의 코르셋까지 함께 옥죄었던 셈이다. 서로가 서로의 채찍이 되어 어린 세대에게서 '꾸미지 않을 자유'를 빼앗을 때까지.
  • (p.113) 외모권력이란 말은 그래서 모순된다. 권력은 초이스를 하는 쪽에 있지 초이스를 받는 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외모권력은 허상이며 타인에게 성적으로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 역시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내 안에 내면화한 남성의 시선, 남성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한 채 살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탈코르셋'은 그저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 (p.115) 남성 중심 사회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이 비밀을 알아채버린 여자, 그리하여 쉽게 통제 가능한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여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뷰티 산업 강국 한국에서 지금 '탈코르셋' 운동이 저항인 이유다.
  • (p.131) 전문 분야 외 영어를 훈련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국내 수요가 부족할 때, 기술 발전으로 갈수록 업무 장벽이 낮아지는 세계 시장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 (p.151) "남자는 다 늑대다." 한국의 딸들은 인생의 첫 번째 남자인 아버지에게조차 이런 경고를 받으며 자란다. 아버지는 동료, 후배 남자들을 변화시키기보다 자기 울타리 안 여성을 단속시킨다. 가정뿐 아니라 학교, 미디어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 조심해야 할 포식자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남성의 본능은 폭넓게 이해되고 빈번하게 면죄부가 주어진다. 여자들은 그런 사례와 함께 성장하며 남성의 폭력성과 함께 여성의 약자성 또한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된다. 농담이든 욕설이든 떠도는 말에는 주술적 효과가 있다.

댓글